‘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Galatians) 독서 후기


새로 뭔가를 해 보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많은 성경 중에서 왜 하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쓰게 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1장-6장 정도의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천만다행이라 여깁니다)

출생, 영유아기, 유치원, 초등, 중등, 고등, 대학교(원), 직장(취업 혹은 창업), 결혼과 출산, 양육, 은퇴….등 사람들은 세상에서 연령과 시기에 따라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칙과 절차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암묵적인 강요를 받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한국이든 다른 국가이든) 교인들이 곧장 취하는 태도 가운데 하나는, 종교를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시켜 그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종교적 조작과 통제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고, 오늘날 한국사회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종교를 그런 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사람들이 거꾸로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자유’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 여깁니다. 성당(교회)에 나가 각종 예식에 속박되어 사느니, 차라리 성당(교회) 다니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속이 더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유의 수명이 짧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목표나 목적이 없이 무작정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면 지겨워지는 것이 사람의 습성입니다. 삶이 가져다 주는 각종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삶이 있다면 당연히 찾아나서고자 합니다.

학벌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하고, 연령에 따라 통장의 잔고도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는 등 각종 사회적 (암묵적) 수준에 도달해야 하고, 조직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을 지키는 것도 이제는 지쳤습니다. 영혼의 평화가 간절해 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갈라’ 서간(편지)에 등장하는 타르수스(Tarsus*)의 바오로(Paul**)는 예수를 만난 뒤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 곧 ‘하나님 안에서 자유의 삶’을 사는 존재로 변화되어 규율과 법규만을 고집하는 당시의 저 따분한 로마 시대의 역사에 전혀 다른 형태의 믿음의 삶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Asia Minor in the Greco-Roman period (332 BC – 395 AD) – general map – regions and main settlements (Image: Wikimedia.org)

그레코-로만 시대(기원전 332년 – 서기 395년)의 소아시아 지역 지도. 지도 중앙에 ‘갈라티아 GALATIA’가 표시되어 있다. 오늘날의 ‘튀르키예'(터키)이다.

(*) 타르수스는 신약성경 속 유명한 인물인 ‘바오로(**바울)’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이다. 고대 로마 속주였던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현재의 ‘튀르키예’; 터키) 중심 도시 중 하나가 ‘타르수스 Tarsus’ 이다. 개신교에서는 ‘다소’라고 부르고 있다. ‘바오로 (Paul)’는 로마제국의 라틴어 이름을 그리스어(헬라어)로 음차한 이름이고, 이스라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사울 Saul’ 로 표기된다. 그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로마시대에 약 9개 국가, 50여개 도시를 여행한 것으로 조사되었고, 그가 여행한 거리만 대략 16,000km-20,000km에 달한다고 한다.

율법을 철저하게 중시하던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로마제국에 넘기던 일을 하였던 ‘바오로’는 ‘다메섹'(오늘날 중동 지역에 있는 ‘다마스커스 Damascus’)으로 향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몇 일 동안 눈이 멀어 앞을 못보는 상황에 처하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후, 기적적으로 시력을 다시 회복되는 체험을 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바뀐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예수를 만난 바오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인격적인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밖에서 (규율 등으로) 우리를 억누르는 분이 아니라, 안에서 자연스럽게 싹트는 믿음으로 우리를 해방하는 분이라는 점을 바오로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오로에게는 영광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이 자유로운 삶을 소개하고, 그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 바오로는 로마 제국의 갈라디아(오늘날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 일대) 지역을 몇 차례 여행하면서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바오로는 예전에 자신이 속해 있던 종파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 교회들을 다시 찾아다니면서 바오로의 견해와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고, 옛 방식을 다시 소개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교 규칙과 규정’이라는 울타리에 다시 가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오로가 이 상황을 전해듣고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옛날 방식의 옹호자들이 강압적인 종교 수단을 소개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여 예수 안에 있는 자유로운 삶을 다시 포기하게 한 것에 분노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위협에 넘어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분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습니다. 그 자신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확실한 실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이후 그의 믿음은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규율과 법칙을 먼저 지킨 이후에야 믿음이 생기느냐? 아니면 좋은 소식을 듣고, 믿는 와중에 ‘성령’을 받는가? 무엇이 먼저이냐에 대해 질문합니다. 바오로는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그 교회들이 우리가 처음 가졌던 자유를 회복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그의 편지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것은 정말로 필요한 지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는 미묘하고 민감한 선물이라서 자칫 오해되거나 악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향한 의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개개인에게는 그 자유가 ‘어디를 향햐고 있느냐?’의 문제 만이 남아있습니다.

현대에서는 (사회와 조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자유 의지도 있습니다. 유투브, 틱톡, 인스타그램에 팔로워를 많이 보유하고자 하는 이유도 이중 하나라 여깁니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남들과 비교하여 초라하지 않기 위해 건물주 혹은 주식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유의지도 있습니다.

나의 경우, 죽음의 순간을 매일 생각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감할 것인가?’ 하는 이슈가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육체(Flesh)의 죽음도 중요하지만, 의식의 흐름이 정지되는 (영혼이 스러져 가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무엇을 소망하고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숨이 끊어지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에도 SNS의 팔로워 수를 생각하고 있을까요? 몸이 망가질 정도로 힘들게 일해서 어렵게 매입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통장의 잔고가 얼마 남았는가를 생각할까요?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저의 경우에는…세상에 하나뿐인 무남독녀와 함께 했던 추억, 살아가는 동안 좋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순간 순간의 좋은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영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평화로웠던 순간들….이런 것들을 생각할 것 같습니다.

치열하게 살다가 예고없이 찾아온다는 인생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특정 시간에…영적으로(마음 속으로) 평화로웠던 순간을 회상하기 위해서 오늘 이 순간, ‘갈라티아서’라는 성경을 다시 읽고, 저자인 바오로(Paul)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Leave a comment

Website Powered by WordPress.com.

Up ↑

Discover more from 지구촌 고물상 The Story of Circular Economy

Subscribe now to keep reading and get access to the full archive.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