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a Ahmed 사라 아메드 (Author)
페미니스트 독립연구자. 파키스탄 출신의 아버지와 영국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영국 랭카스터 대학교 여성학 연구소장과 골드 스미스 런던대학교 인종 문화연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2016년에 학내에서 발생한 성적 괴롭힘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 학교에 항의하며 교수직을 사임했다.

페미니즘, 퀴어 연구, 현상학, 후기식민주의, 다문화주의, 감정 연구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흥을 깨뜨리는 페미니스트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일상과 구조를 가로지르는 비판적 실천에 집중하고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감정이 단순히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신체의 반응으로 어떻게 나타나며, 각각의 감정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작동하는 지를 탐구한 책이다. 책을 기술하게 된 지적인 동기는 ‘감정에 관한 페미니즘 연구’였다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감정에서 시작하여 신체의 변화를 거쳐 행동으로 나타나고, 행동들이 모여 사회의 반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이론 중 하나인 (감정과 신체의) ‘교차성 Intersectionality’ 이론 모델을 응용하여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An Affective Turn’이란 용어를 ‘정동적 전환’이라고 한국어 번역에서는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용어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반인의 머리 속에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감정이 외부로 발산되어 공동체(*혹은 특정 공간에서) 전체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정서적 전환’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라 생각한다.

고통의 우연성 55-98
고통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며,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능동적으로 드러낼 때에야 다른 이들이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Kotarba 1983: 15)
‘고통은 은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 정확히 어떠한 지 알 방법은 없다.‘ (Melzack and Wall 1996: 41)
고통의 고독함은 고통이 함의하는 타자와의 관계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타인의 고통이나 마주한 상처는 우리가 서로 멀어지지 못하게 만들면서도 우리를 하나로 묶지는 못한다.

고통에 대하여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공감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없는 고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의 깊게 경청하는 일이 아니라 (몸, 역사, 공동체가 동일한 고통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다르게 살아가는 일이다.
이는 행동을 요구하고 집단적 정치를 요청한다. 고통은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정치,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 곁에서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가 아님을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배우는 정치를 우리에게 요청한다.
증오의 조직화 101-139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인 설명을 참조하자면, 분노와 증오는 구별된다. “분노는 대개 개인을 향하지만, 증오는 집단 전체를 향하기도 한다”
고든 올포트는 <편견 The Nature of Prejudice>에서 “협려과 사랑의 관계는. 언제나 증오에 선행한다. 사실 오래동안 지속된 좌절과 실망감 없이 증오가 생길 수 없다” 고 말했다.
우리는 대상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와 닮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나와 다르기 때문에 ‘증오’ 한다.
증오의 반대편에는 무관심이 있다.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다가 지친 상태에서 사람의 감정은 분노로 바뀌고, 분노가 층층이 쌓이면서 ‘증오’의 감정으로 변하게 된다.
인종차별에 기초한 증오의 정치는 인종적 타자에게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우리는 이를 ‘다른 이들을’ 닯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공포의 정동 정치 143-180
다른 사람을 (공간적/관념적 양쪽 모두) 가두는 일에 일조하는 ‘공포 경제’는 세계 곳곳에 몸을 누인 난민 신청인이 말 그대로 사망하는 사건을 통해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공포의 대상이 인종이나 난민이라는 개념으로 집단으로 확대되면 대상인들은 기피하거나 멀리해야 하는 타겟이 되어버린다.
원래는 보호받아야 할 약자가 특정 집단을 위협하는 관념의 존재로 전환되면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제압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호주에서는 Tempa라는 이름의 배가 정박을 거부당한 사건이 있었다. 배의 화물칸에는 433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타고 있었다.
난민 신청인에게 미래를 약속한 곳이었던 이들 국가는 타자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공포의 세계 경제에 주목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서늘하게 깨닫게 된다.
역겨움의 수행성 181-222
다른 대상이 애초부터 나보다 낯설고 우리에게 낮선 존재로 이해되고 인식되는 한, 타자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구역질을 느끼는’ 원인으로 여겨진다.
인식의 경제에서 특정한 몸은 테러리스트 단체와 실제로 관련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테러리스트 몸으로 간주된다.
‘무슬림’ 혹은 ‘중동 출신으로 보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테러와 관련이 있다거나 테러리스트 ‘일 수도 있다’는 이유 만으로 인종차별적인 공격과 괴롭힘으로 피해를 겪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느끼는 수치심 220-263
개인 차원의 “수치심은 자아가 지닌 어떤 자질이 문제가 된 상태일 때 발생한다.” 특히, 내가 ‘마음을 두고 있는 누군가’가 나의 잘못된 행동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고 느낄 수록 수치심은 더욱 커진다.
죄책감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처벌을 염려하는 상태에서 발생하지만, 수치심은 처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국가와 같은 집단은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국가는 수치심을 이용하여 과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을 피하려 한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도 과거의 정부가 했던 일에 대해 현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취한다.
아프리카 국가와 국민에 대한 식민지배를 주도했던 영국은 지난 2001년 유엔에서 벌어진 아프리카 피해 국가들의 공식적인 사과 요구에 과거의 사건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언급하며 정부 차원의 응답을 거부했다.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든 처리해야 하는 일본의 경우에는 아예 수치심이 없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2024년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주장이나 요구를 일관되게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수치심에 대한 개념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더욱 독특하다. 개개인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미리 나서서 행동이나 발언을 삼가하여 공동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이다. 따라서, 혼네(True Feeling, 진정한 느낌)는 드러내지 않으며, ‘타테마에(Public Facade, 공적인 인상)‘에 집중한다.
수치스러운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다. 공동체가 개인을 보호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심각한 해를 끼친 개인의 경우, 공동체 내에서의 이지매(따돌림)을 거쳐 심할 경우에 공동체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이 될 경우 ‘할복’(자살)에 이른다.
그 반대의 경우인 ‘국가의 과거 역사에 드러난 수치스러운 행위’가 ‘국민에 대한 사과’로 이어진 경우는 전무하다. 간혹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머리숙여 사과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역 내에서 권력을 잃을 경우에 한정된다.
머리를 숙이는 행위도 정부 내각 차원이 아니라 개인 정치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러한 개별 정치인의 머리 숙임 자체도 ‘혼네’라기보다는 ‘타테마에’에 가깝다.
퀴어 느낌 308-356
Queer 퀴어는 정상과 다른 것을 선호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특히, 전통적인 개념의 성적 취향과 반대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보다 좀더 광범위한 개념을 포함한다.

퀴어를 지향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다르다. (기본 전제조건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각본인 이성애는 모든 관계가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서 비롯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퀴어를 싫어하는 이들은 (미래에 만나) 이성적으로 상대하고, 가족을 이루고, 재생산, 돌봄을 위한 성적 파트너를 앗아간다는 두려움에서 퀴어를 경계하고 싫어한다. 즉,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를 일삼는 이들은 자신이 누려야 하는 기쁨을 타자가 훔쳐갔다고 믿는다.
공동체나 집단, 국가적 차원에서는 퀴어가 (전통적 관념의) 이상적인 성적 대상을 ‘향하지 못한 것’은 이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며, 이 움직임은 이상적인 사회를 재생산하는데 실패한 것이자, 삶을 둘러싼 사회적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의로운 감정 408-432
무언가가 나쁘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일을 아픔, 고통, 괴로움의 경험 여부로 환원하는 것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타자가 괴롭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할 경우, 오히려 폭력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으로 인해 어떠한 폭력은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로 인해 영장실질 심사가 법원에서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는 구치소에 수감된다. 구치소 수감 과정은 신체검사(항문 검사 포함)를 포함하여 법원에서 판사의 확정 판결을 받아 수감되는 ‘범죄자’와 동일하다.
아직 법원에 기소도 되지 않은 단순 피의자와 같은 사람이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가 이루어진 국가 공권력에 의한 폭력적인 사안이지만, 누구하나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정의로운 감정은 상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놓지 않고 상처에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은 우리에게 시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감정은 바로 시간의 살(Flesh)이다.
감정은 역사가 의식적인 차원에서 기억되지 않을 때도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지, 식민지배, 노예제, 폭력의 역사가 어떻게 현재 시점에서 삶과 세계를 형성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정의는 단지 느낌이 아니며, 느낌이 항상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의는 느낌을 포함한다. 느낌은 우리가 세계의 표면을 가로지르도록 하며, 우리의 삶을 이루는 내밀한 테두리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우리가 이 느낌을 가지고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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