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인 거악을 넘어 새로운 보편으로
‘중화민족’ 개념의 형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지금의 중국 문화는 ‘한족’이라 말하는 단일 유전자 보유 집단이 만든 것이 아니다.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혈통과 문화가 상호 뒤섞이면서 성장한 결과물이다.
중국 근대화 과정 중 1930년에 벌어진 일본이 저지른 만주사변도 중화 민족이란 의식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정 민족의 유전자 풀이 바뀌는 경우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
1) 인구가 늘면서 주변을 정복해 가는 경우, 2) 외부인이 침범하여 원주민의 남성을 도륙하여 부계 유전자가 바뀐 경우(한나라 제국이래 북방의 주민과 군대가 계속 남하하면서 한족이 득세함).
마지막으로, 전쟁 후에 왕족과 상층부만 교체되고 중하류층에는 변화가 없는 경우(상 왕조가 주나라로 교체되면서 역사시대가 시작됨)이다.
중국은 서구 사회의 인종차별,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악마화에 대해 비판하지만, 정작 자국 영토 내의 다양한 문화는 포용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소수 민족이 권력을 장악한 원나라(몽골), 청나라(여진족), 그리고 근접한 당나라(선비족)시대 만이 문화와 정치의 분권화를 통해 ‘중화권 통합’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중국은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될 당시만 해도 지금의 중국 영토 개념이 희박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근대 선각자인 쑨원의 경우, 만리장성 안쪽 18개 성만을 중국 영토로 하자고 주장했다. 당시에 지금의 외몽고와 티벳트는 이미 독립을 선언한 상태였다.
중국이 경각심을 가지고 지금의 영토와 중화 민족 개념을 형성한 계기는 1930년 일본이 저지른 만주사변 이후 연이은 일본의 세력 확장에 위험을 느낀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개념은 다소 희박했다.
특히, 광동성 사람들은 국가 혹은 민족보다는 자기의 거주 근거와 문화를 우선적으로 중시하였고, 동남아시아 화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방 거주민들도 국가에 대한 개념 역시 무척 희박했다.
심지어 청일 전쟁 이후, 혁명파인 쑨원은 일본 군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근거지인 광동성을 차지하려 했고, 개방파인 캉유에이 역시 일본 낭인 집단인 흑룡회의 도움을 받아 광동성을 공략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국가와 민족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삶의 근거지인 ‘광동성‘ 하나를 놓고 자기 나라를 침략한 외세를 끌어들이려 한 셈이다.
중국이 대만을 놓칠 수 없는 이유는 통일된 중국을 희망하기 보다는 남쪽 바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더욱 경계하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가운데, 중국이 갖추어야 할 소프트 파워는 폐쇄적인 한족 중심주의나 중화 민족주의가 아니라, 시민들이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다른 민족과 이웃 나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군사력과 반도체 등 신무역 통제 기법을 구사하는 미국은 이미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실수를 반복할 이유는 없다.
아쉽게도 중국이 홍콩을 대하는 태도와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사례처럼 민족주의 정서를 등에 업고 대만과 계속 갈등 국면으로 나아가면, 치열한 국제 외교 질서에서 치유 불가능한 후유증(자국민의 해외탈출, 전쟁으로 인한 피해 등)만 남는다.
중국 콘텐츠의 확산, 세계화 가능성
과거 중국에서 한류 붐이 일었던 것처럼 현재는 중국의 연애물, 웹소설 콘텐츠의 동남아 수출 붐이 일어나 중국과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 비슷한 중국 선호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창작 흐름에 찬물을 붓고 있는 것은 중국의 미디어 검열 등 폐쇄적인 정책이다. 베이징의 경우 치안 자원봉사자로 등록된 사람이 84만 명, 동원 가능한 인력을 합치면 140만 명의 잠재적 감시자가 있다고 한다. CCTV 140만 대가 사람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이후, 언론의 자유가 막히고 검열이 강화되면서 중국 콘텐츠 분야는 최악으로 내달았다. 중국 현지에서는 인터넷에서 애국주의를 강요하는 바람에 디지털 콘텐츠의 경쟁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빗대어 ‘문화 백혈병’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부작용으로는 공산당 중심의 국가가 중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통해 부여하는 ‘강국을 향한 꿈’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회 비평 작품의 경우, 중앙정부나 공산당을 피해 지방정부와 하급 관리, 기업을 대상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등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 결과 콘텐츠 자체가 세계인의 공감을 얻기에는 스스로 한계를 지닌 상태로 중국 내수용으로 만 사용되는 역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이에 더해 한한령과 펜데믹을 거치며 외부와 교류가 중단되는 바람에 상당기간 한국 등 주변국의 위상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 것도 중국 콘텐츠 산업이 뒤쳐지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한국인 역시 일취월장한 중국의 애니메이션, 인터넷 게임 제작 기술 등 현재의 중국 대중 문화를 제대로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중국 대중문화 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은 K-컬쳐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못한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등 적나라한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오스카상까지 거머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등 유사한 동양 문화권에서 무한대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한국의 콘텐츠를 지켜보는 쾌감과 대리 만족감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내수용 문화와 외부 문화까지 모두 수용하는 문화의 쌍순환을 추구한다. 중국 문화의 내부 순환이 자폐적인 고리에서 벗어난다면 세계인들 역시 외부 콘텐츠의 순환을 통해 ‘중국 특색의 보편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중국의 권력구조, 사회 계층 이동
서구 사회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과도기가 거의 없었지만, 중국은 봉건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간극이 2,000년이나 존재한다.
2천 년의 기간 중 서주시대부터 춘추 전국시대까지를 세습사회, 한나라부터 청나라 말기까지를 선거(선발)사회라고 구분하는 학자는 베이징대학교 정치철학자 허화이훙(何懷宏) 교수이다.
중국은 근대화 이전까지 군주는 세습되고, 관료는 세습이 불가하도록 과거제와 같은 인재영입 시스템을 만들어 권력의 균형을 꾀었다.
중국 상위 관료의 권력을 얻는 방법은 관직에 채용되는 것이었고, 관료가 되는 조건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화 역량/자산, 즉 아비투스 Habitus였다. 또한, 권력 획득까지 힘들게 관직에 오른 과정을 거치면서 보신주의와 기회주의가 만연했다.
1900-1905년에 일어난 근대화 운동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목격한 후 과거제는 폐지되었다. 그 결과, 권력의 최상층부와 최하위층인 농민계급을 연결할 중간 엘리트 계급이 사라져버렸다.
견제할 중간 엘리트 세력이 없어진 향촌 관리의 각종 부정부패와 지속적 착취는 역사적으로 모택동 농민혁명의 빌미를 제공했고, 그 혁명은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토대가 되었다.
황제/왕권 중심의 전제주의 사회, 계약에 의한 봉건사회,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체제, 선출된 권력과 다수결의 원칙으로 진행되는 민주사회 중 어느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도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한 지 거의 100년의 시대를 지났지만, 군사 구테타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의 사회적 갈등, 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되는 등 폐해 역시 상당하다.
민주주의 체계이지만, 한국 사회 전반이 보수 성향 유권자 중심으로 여전히 남아있고, 계층 상호간의 불평등이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와는 발전 경로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자유 민주주의 모델 만을 금과옥조로 여길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정치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경제는 복지와 평등을 최우선으로 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시스템을 혼합한 국정 운영 시스템이 한국의 실정에 적합할 수도 있다.

(자료출처: AFP, ABC News, 연합뉴스, Xinhwa News, List of Politburo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Political Bureau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on Wikipedia 2023-10-09)
중국을 온전한 공산당 국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치 시스템은 공산당 중심이지만, 경제 시스템은 시장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 체계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치 지도자들이 여론에 민감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론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인터넷 등 검열을 그렇게 강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을 “언제라도 거센 풍랑이 몰아칠 수 있는 민심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로 비유했다. 공산당 중심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정치인들도 민심의 향배에 온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주변 국가들이 ‘코로나와 함께’ 하는 세상을 전개할 때, 중국은 ‘제로 코로나’와 봉쇄 정책을 한동안 계속 추구했다. 그러다 2022년 하반기부터 어느 순간 봉쇄를 해제하였다.
해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기득권 세력의 불만이 폭발했을까, 아니면 중간 계층의 여론이 공산당을 위협할 만큼 폭발 일보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봉쇄를 해제했을까? 아무도 해제한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 정부는 누가 뭐라 하든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 만의 정체성에 맞는 정치.경제 시스템과 발전 목표를 설정하고 집요하게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공산당 통치와 법치국가의 경계선
공산당 중심의 중국이라 공산당 마음대로 중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한국인의 생각도 오해 중 하나다.
중국의 형법은 오랜 세월 치른 전쟁을 기반으로 하는 통제와 처벌 시스템이었다. 1908년에 헌법대강과 1911년에 도입된 대청신형률에 따라 죄형 법정주의를 도입하고, 잔인한 형벌을 삭제해 나갔다.
비록, 정치적 반대 의견과 시민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소란죄’와 같은 악법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1997년에 현대적 형법이 도입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국도 국가보안법을 생활 구석구석 광범위하게 적용할 경우 심각한 인권 문제가 발생한다.)
일부 악법 조항이 살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바닥에 깔린 법의 적용 원칙은 한-중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중국 근현대 법학의 태두 선자번 (沈家本, 1840-1913)은 100년 전 이렇게 말했다.
“법가는 전제 통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아서 민중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 반대로, 법치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는 ‘권력을 구속함‘으로써 민중에게 ‘자유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2023년 10월 현재, 압수수색이 수시로 벌어지고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 not by rule of law)가 만연한 한국은 과연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보다 법 적용에서 더 민주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이는 민주적으로 제정된 법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제도화 된 폭력’의 도구인 법을, 누가 얼마나 절제하면서 적용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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