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선출직(임명직) 공무원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투표하는 것 밖에 거버넌스에 대한 책임이 없는 기존의 부지런하고 효율적인 시민 구경꾼들은, 도래한 새 시대에 자신의 생태 지역을 관리하는 데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동료 시민(peer)이 이끄는 시민 의회에 어느 정도 자리를 내준다.

이미 국민 국가가 전통적으로 민형사 사건에서 동료 시민의 유죄나 무죄를 판단하도록 ‘시민 배심원 제도’를 확립했다는 선례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고전적 명언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겹겹히 연결된 가상의 세계와 물리적 세계에서 성장하는 젊은 세대는 ‘나는 참여한다. 그러므로 존재하다’는 격언을 더 선호한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안진환 옮김. <회복력 시대 The Age of Resilience-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nding earth>. 민음사. 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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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영국은 토지와 사람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지역의 영주가 토지를 (일부이긴 하지만) 매각할 수 있도록 부동산을 판매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 제도의 변화는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영주에 소속된 농노(농업 노예)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고, 현대 인력시장의 구인, 구직 제도가 이 시기를 분기점으로 태동했다. 한편으론, 상당수에 이르는 농노들은 실직에 이어 빈민으로 전락했다. 농노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지고, 근로계약 권리 등 자율권도 주어졌지만, 변환기에는 혼란도 뒤따랐다.

2023년 현재, 디지털로 연결된 인류에게 ‘자유’의 의미는 자율성과 배타성이 아니라 ‘접근성’과 ‘포용성’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접근성은 스마트폰의 발달로 물리적 공간의 거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포용성은 내 주변의 생명체와 더불어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접근성과 포용성)는 ‘동료 시민정치’의 근간을 이룬다.

2019년 OECD 보고서는 ‘현재의 민주주의와 거버넌스의 구조는 (*시민 혹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고 결론 지으며 거버넌스 형태로 ‘대의민주주의’ 실패를 지적했다. 뭔가…새로운 국정 운영 체제가 필요함을 암시한 것이다.

요즘 많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시.도)에서 실시하고 있는 ‘주민 참여 예산’ 제도는 1989년 브라질‘포르투 알레그레’에서 가장 먼저 실행되었다. 민주제도와 인권보호가 그런대로 잘 갖추어져 있다는 유럽, 미국, 캐나다 등 선진국이 먼저 시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브라질은 기존과 비교했을 때에, 이 제도 도입으로 공공부문 예산(상하수도, 보건 및 교육예산, 학교, 도로 등)이 ‘가장 가난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편성’되고 증가했다는 것이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결과 확인되었다. 브리질이 운영하는 시민 의회의 참여자는 현재 ‘4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시민사회가 조직한 단체의 표기를 NGO(비정부기구), NPO(비영리기구)에서 CSO (Civil Society Organization, 시민단체사회)로 변경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정부가 아닌 단체,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단체라는 표현은 왠지 정부측 시각에서 바라보는 표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교묘한 차별적 표현이라 생각된다. 조직을 상징하는 ‘명칭’이 조직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시민사회단체’는 시민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사회운동의 주체이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허용되면 안되는’ 움직임이다. 미국 국세청에 등록된 비영리기구의 수가 150만개에 이르고, 미국 경제 기여도 1조 달러를 넘었지만 미국 경영대학원을 비롯한 교육기관 중에 ‘시민사회단체의 구실’에 관해 커리큘럼을 배정한 곳은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는듯 하다.

미국에서 세번째로 큰 학군을 보유한 시카고(Chicago)가 1988년에 의미심장한 ‘학교개혁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시카고 모든 공립학교에 ‘지역학교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로써 소수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가 무너지고, 다수의 지역주민에 의한 학교 운영 흐름이 형성되었다.

2017년 스탠퍼드대학교의 연구 결과는 놀랍다. 3학년-8학년 사이 시카고 공립학교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미국 다른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빈곤하고, 폭력성이 난무한 도시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시카고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 의미심장하다.

교육에 이어서 ‘시카고 치안(경찰)’분야에서도 시민이 주인이 되는 분산형 거버넌스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변화가 탄생했다.

2021년 7월, Lori E. Lightfoot 시카고 시장과 시카고 시의회가 시카고 경찰국과 경찰의 위법행위를 조사하는 ‘독립 수사기관(COPA)과 최초의 독립적인 시민 감시 기구를 설치‘해서 경찰위원회를 감시하게 하는 역사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권력기관을 제대로 견제하는 공식적인 시민 감시기구의 탄생이다.

The Community Commission for Public Safety and Accountability는 시에서 임명한 시민 7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원회는 특정 사안에 대해 감사를 요구하고, 시의회의 조언과 동의를 전제로 주요 책임자를 임명할 권한과 경찰 예산 책정에 변경을 요구할 권한까지 보유하고 있다.

예산, 공교육, 치안 유지는 정부를 운영하는 핵심 요소다. 한국도 기획재정부(예산), 교육인적자원부(교육), 경찰청(2023년 현재는 행정안전부 포함)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지만 누리는 권한에 비해 견제를 할 수 있는 법적 제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 현실이다. 의회가 진행하는 국정감사는 정당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국민감사 청구제도가 있긴 하지만 청구 절차가 녹녹치 않다.

스마트 3차 산업혁명 정보 인프라는 지역과 대륙으로 활동 영역이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좀더 쉽고 폭넓게 남겨 놓고 있다. 인간들에게 거버넌스의 우선 순위 재조정에 활용할 수 있는 모바일 기반의 초고속 정보 인프라이다. 이와 병행되는 ‘동료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거버넌스는 지역사회 전체가 공공 자산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도록 하고, 개별 시민에게는 자신이 거주하는 생태지역에 대한 책임있는 공동 관리자 권한을 부여한다.

5 thoughts on “회복력 시대: 분산형 동료 시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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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공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우리의 신경회로에 공감 능력이 부재한다면 타인의 삶의 취약성과 번성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를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이해하게 된다.

    경외감이 없다면 놀라운 일도 없을 것이다. 놀라운 일이 없으면 상상력도 없다. 상상력이 없으면 초월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타인에 대한 공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상호작용의 앙상블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 존재를 알게 된다. (P356-357)

  2. 관계적 자아를 위한 회복력은 자립성과 자율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취약성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삶의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하는데, 삶의 긍정적인 경험은 풍부한 관계망을 만들고, 풍부한 관계망은 다시 회복력을 강화한다. (P355)

  3. 민주주의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공감하는 문화일수록 사회적 가치와 통치의 관습이 민주적이다. 문화적 공감력이 떨어질수록 사회적 가치와 통치 제도가 전체주의에 가깝다. (P354)

  4. 역사상 공감의 진화는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가 남을 때까지 ‘타자’를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공감의 진화와 평등의 진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p353)

  5. 평등의 가장 순수한 표출은 법률과 선언을 통한 인정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공감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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